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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천교 신도들을 건져 주심
  • 무진, 기사년 사이에 각 지방 보천교 신도들이 대흥리와 그 부근 마을로 이사하여 신앙촌을 이루거늘
  • 갑자기 수천 가구가 이주해 오니 신도들과 그 가족이 대부분 직업이 없어 마침내 생계가 곤란하게 된지라
  • 차경석이 구제 방편으로 벽곡방문(辟穀方文)을 공포하고 벽곡을 장려하나 그로 인한 독(毒)과 기아(飢餓)로 죽는 자가 속출하고 남은 사람들도 모두 굶주림에 시달리니라.
  • 이 때 태모님께서 왕심리에 우거(寓居)하시매 보천교 신도들이 매일 수십 명씩 와 뵙고 굶주림을 호소하니 왕래하는 자가 무려 만여 명이 되거늘
  • 태모님께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들을 거두어 구제하시니라.
  • 이로 인해 도장 운영에 지장이 많더니 마침 경찰로 있는 강재룡(姜在龍)의 도움으로 수일을 지내고
  • 또 박종오와 김수열이 임옥 지방을, 이용기 등이 전주, 익산, 김제 지방을 순회하여 경비를 조달하매 간신히 충당이 되니라.

  • (증산도 道典 11:274)




  • *** 274장 보천교가 한창 부흥할 때는 신도들이 가져오는 돈의 액수에 따라 그에 맞는 감투를 주었다. 이렇게 하여 전국의 작은 고을 수령까지 내정되었는데, 후천이 오면 장상과 고을 수령까지 해먹겠다는 계산이었다. 이는 상제님께서 ‘각기 왕후, 장상을 꿈꾸다 그릇 죽은 동학 역신들을 해원시키리라.’ 하신 말씀과 깊은 관련이 있다. 5편 205장 참조.
  • 3절 274:3 그 때는 곡식이 없어 소나무 껍질, 솔잎, 시래기 등을 먹고살았으며 굶어 죽은 사람이 수천 명이었다.(보천교 방주의 아들 한학규 증언)